2015년 10월 25일 일요일

보수파에 끝내 진 '교황의 파격'

시노드 결과 동성애자 원칙 못 바꿔… 이혼·재혼 신도 영성체 참여는 허용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수 세력과 힘겨운 전투를 치렀으나 결국 패했다."(영국 일간 가디언)

▲ 프란치스코 교황 AFP 연합
24일(현지시간) 폐막한 제14차 세계가톨릭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서 민감한 주제에 대한 토론 결과를 놓고 교계 진보와 보수 세력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 4일 개막한 시노드는 3주간 이혼과 재혼, 피임, 동성애, 교회 내 여성의 역할 등 다양한 의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이어 왔다. 이날 마지막 총회에선 이혼·재혼한 신도도 사례별로 영성체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나 동성애자에 대해선 기존 원칙이 그대로 답습됐다. 시노드는 이런 내용의 최종 보고서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전달했고, 교황은 “닫힌 마음이 드러난 시노드였다”고 질타했다.

최종 보고서에선 동성애 결혼에 대해 이성 사이의 결혼과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개인의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에 대해선 무관용 원칙을 확인했다. 주요 쟁점 중 하나였던 이혼·재혼 신도들의 신앙생활에 대해선 사안별로 영성체 참여를 허용하도록 했다.

가디언은 “보수·개혁 등 성향별로는 물론 지역별로 대립하면서 상처 치유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뉴욕타임스도 “보수의 판정승”이라고 지적했으나, AP통신은 “그나마 보수 사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교황이 작은 승리를 얻어냈다”며 상반된 평가를 내놨다. 시노드는 교황의 자문기구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내린 합의는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5일 열린 시노드 폐막 미사에서 “교회가 교리에서 벗어난 신자들을 더 포용하고 덜 비판해야 한다”며 “설교 없이도 신자들이 신의 연민 어린 자비를 느끼도록 하는 게 성직자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북한읽기] 북한 경제의 괄목상대, 평양이 평해튼으로

조동호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원장
입력 : 2015.10.26 03:00

평양 곳곳 고층건물, 외제 상점… 맨해튼 합성한 '평해튼' 별명도
市場 확산되며 체제는 붕괴 위험 '도움되는 장마당, 안되는 노동당'
北 주민들 사이 비아냥도… 北 경제 비중 높이도록 유도해야


조동호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원장 사진
조동호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원장
평해튼, 평양과 맨해튼(Manhattan)의 합성어. 요즘 평양에 상주하는 외국 대사관 직원들과 국제기구 관계자들은 평양을 이렇게 부른다. 익히 알려졌듯이 맨해튼은 뉴욕의 핵심이자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월스트리트로 상징되는 세계 금융과 비즈니스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런 맨해튼을 평양에 갖다 붙인 것이다. 그만큼 평양의 경제가 놀랄 만큼 변하고 있다는 뜻이다. 곳곳에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어쩌다 차 한 대 지나가던 거리에 교통 체증이 빚어지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과 대규모 외제 상점도 한두 개가 아니다. 평양만의 상황이 아니다. '혁명의 수도' 평양만큼은 아니지만 지방 경제도 호전되고 있다. 배불리 먹지는 못해도 아사(餓死) 이야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는 됐다. 북한 경제 분석에 지나치게 신중한 한국은행조차 지난 수년간 북한 경제가 플러스 성장을 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경제 상황 개선이 북한 당국에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시장 확대가 경제 호전의 핵심 요인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의 부의 축적을 없애겠다는 것이 사회주의이고 수요와 공급의 불안정성을 막겠다는 것이 계획경제인데, 북한 현실은 이와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이미 시장에서는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고 있다. 국가가 아니라 시장에서 크게 돈을 번 '돈주'들이 경제 운영의 주인이다. 이들은 국가기관의 명의를 빌려 아파트를 짓고 분양을 통해 돈을 번다.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건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개인이 짓고 개인이 소유한다. 제조업도 그렇고 수산업도 마찬가지다. 국가기관의 어선을 빌려 개인이 조업을 한다. 당연히 번 돈의 일부는 지배인과 관련 공무원들에게 뇌물로 준다. 외양은 사회주의지만 내용은 자본주의다.

그러다 보니 계획경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시장에서의 경제활동 자체가 '계획 밖'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컴퓨터나 휴대폰으로 상품을 검색하고 구매하는 전자상거래도 시작됐다. 개인에게 물품을 할당하는 계획경제는 이미 사라졌다. 국가 배급망에는 물품이 없어도 시장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의 물품을 사는 경제가 된 것이다.

자연스레 북한 주민은 경쟁에 익숙해졌다. 시장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다른 사람보다 많이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식 사회주의'의 자랑이었던 평등은 낯선 단어가 되었다. 고려항공택시라는 회사는 '최대의 안전성과 성의 있는 봉사'를 보장할 테니 '널리 리용'해 달라는 광고도 한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격차를 만들어 낸다. 탈북자 조사에 따르면 북한 하위 계층의 월 생활비는 북한 돈으로 6만원 정도인데 상위 계층은 116만원에 이른다. 우리보다도 더 심한 양극화이다.

경제는 좋아지고 있는데 체제 자체는 붕괴하고 있는 아이러니. 그것이 바로 현재 북한 당국이 직면한 딜레마이다. 북한에는 당이 두 개 있는데, 도움되는 장마당과 도움 안 되는 노동당이라는 주민들의 비아냥까지 나온다. 그렇다고 시장이 워낙 커져서 없앨 수도 없다. 시장의 효율성을 경험한 데다가 이젠 시장이 삶의 터전이 된 주민들이 시장의 폐쇄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을 리도 만무하다. 더욱이 생전 처음 겪어보는 양극화에 하류층의 불만은 상당한 수준이다.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김정은이 그 숱한 무기들을 바라보면서도 핵과 미사일 대신 '인민 사랑'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김정은 시대의 슬로건인 경제와 핵의 병진 노선이 경제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북 전략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북한의 병진 노선이 핵개발 목적이라고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자꾸 경제의 비중을 높여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조만간 재개될 남북 경협도 북한의 시장 확대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북한 경제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책적 호기가 다가온 것이다. 남북 관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문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25/2015102502418.html

2015년 10월 1일 목요일

[단독] 북 핫라인 통해 자주 불만 표출…지금은 그런 채널 없어 아쉬워

입력 2015.10.02 03:11 수정 2015.10.02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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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왼쪽)은 1일 본지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때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이 개설됐다”고 처음으로 공개했다. 오른쪽은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조문규 기자]


남북 정상 간 핫라인(직통전화)이 존재했고 남북 정상 간 수시로 통화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2007년 10월 2차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김만복 전 국정원장과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1일 본지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 간 핫라인의 존재를 비롯해 정상회담 뒷얘기를 공개했다. 인터뷰는 최익재 외교안보팀장이 진행했다.



 -2차 남북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백채널(비밀창구)을 활용했나.

 ▶김만복
=“이미 양국 정상 간 핫라인이 개설돼 있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울과 평양에) 직통으로 연결된 전화기 앞에 직원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 정상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통화가 가능했다. 핫라인을 통해 남북 정상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용이 공개되진 않았다. 물론 그 존재는 비밀이었다. 지금은 남북 간 핫라인이 없어져 참 아쉽다. 그 라인을 통해 북측이 불만도 많이 표출했고 오해라는 설명도 많이 했다.”

 -핫라인이 개설된 과정은.

 ▶김만복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을 때 남북 간 백채널이 없어 (재일동포 사업가인) 요시다 다케시(吉田猛)를 활용해 북한과 접촉했다. 나도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기에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측에선 우선 요시다를 통한 대북 접촉을 해보고 여의치 않을 경우 제2, 3, 4선을 통해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요시다를 통한 대북접촉이 원만하게 성사됐다. 이렇듯 김 전 대통령 시절 잘된 남북관계로 인해 핫라인이 개설돼 노무현 대통령 때까지 이어졌다.”

 핫라인 외의 남북 간 직통전화는 1971년 처음으로 개통됐다. 그해 9월 남북 적십자회담 제1차 예비회담에서 처음으로 합의돼 판문점 내 양측 지역을 연결했다. 72년에는 7·4 공동성명을 계기로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 노동당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사무실에 직통전화가 각각 설치됐다. 이후 판문점 남북 연락사무소와 군 상황실, 항공관제센터 등에 직통전화가 개설됐으나 모두 실무진을 위한 라인이었다. 정상 간 핫라인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이 자주 쓰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이 10·4 선언에도 들어가 있는데.

 ▶김만복
=“말 그대로 받아들이자.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북한이 먼저 이 말을 쓰고 선전에 활용하니까 문제가 된 것이다. 2차 남북 정상회담 합의문(10·4 선언 제1항 ‘…남과 북은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며…’)에선 이 문구를 받아들였다. 2007년 사전협의를 위해 두 번째로 평양에 갔을 때 북측에서 갖고 나온 합의문엔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한민족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고 돼 있었다. ‘우리 민족끼리’는 넣고 ‘힘을 합쳐’는 빼자고 했다. 우리가 반미전선에 합류하는 듯이 북측이 선전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밤 12시가 됐는데도 안 빼더라. 그래서 내가 ‘끝내자. 짐 싸라. 서울 가서 대통령 지침 받은 후 다시 얘기하자’고 한 뒤 침실로 갔다. 그랬더니 새벽 4시에 날 깨우더라. 내가 확고하단 뜻을 다시 밝혔고 결국 그 표현은 빠졌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김만복
=“김정은에 대해선 분석과 추적이 더 필요하다. 젊은 혈기로 작은 자극에 크게 반응할 가능성도 있다. 남북관계를 풀려면 김정은에게 주는 자극을 정부 차원에서 조절하는 게 어떨까 싶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 다른 수단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재정=“우선 김정은을 인정하고 실체를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김정은의 성격 같은 것을 파헤치기보다는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집권층을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위는 바뀌었지만 내부는 전혀 안 바꿨다. 통일전선부만 하더라도 이희호 여사가 갔을 때 영접한 맹경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원장은 한 20년 동안 일선에 있는 사람이다. 김정은에 대한 이해와 판단도 중요하지만 그 라인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8·25 남북 고위급 접촉 합의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아졌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김만복
=“박근혜 정부가 지나치게 집착하는 대북 원칙은 바로 핵 문제다. ‘선(先) 핵 해결, 후(後) 남북관계 개선’이다. 이렇게는 절대 핵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8·25 합의가 선순환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는 위기상황 극복을 위한 산물일 뿐이다. 한두 차례 이산가족 상봉과 군사회담만을 하고 모든 것이 원위치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재정=“박근혜 정부의 대북원칙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비공식적 대화와 공식적 대화가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며 움직여야 정상회담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번 8·25 합의에 따른 이산가족 상봉이 남북관계를 푸는 출발점은 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는 국제적 환경도 중요하다.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북핵 문제인데.

 ▶김만복
=“북핵 문제가 남북관계의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 두 가지를 모두 염두에 둔 병행전략을 써야 한다.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분명히 북핵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온다. 10·4 선언에도 당시 필요한 만큼 북핵과 관련한 내용을 넣었다. 그 과정에서 김계관 당시 외무성 부상이 정상회담 석상에 와서 김정일 위원장도 미처 보고받지 않은 내용을 직접 노 대통령과 김 위원장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회고록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 10·4 남북정상선언』에 따르면 북측은 “핵 문제는 북·미 간 사안으로 6자회담에서 다루겠다”며 의제화 자체를 거부했다. 10월 4일 오전 회담에서 북핵 문제로 논의가 막히자 김정일은 6자회담 수석대표 김계관을 불러 북핵과 관련한 보고를 하게 했다.

 -정상회담을 한 지 이제 8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회고록을 펴낸 이유는.

 ▶김만복
=“이번 책은 본래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인 10·4 선언문의 해설서 격이다. 현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려면 꼭 참조할 내용이라고 본다.”

 ▶이재정=“박근혜 정부 후반기에 남북관계에 분명 어떤 변화가 와야 한다. 그 변화는 6·15 남북공동선언(2000년)과 10·4 선언의 정신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국민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책을 냈다.”

정리=유지혜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원문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18776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