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 중 하나가 최승희 무용 보급인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 무소속 대변지 주간 <통일신보>는 5일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재조명하면서 "장군님(김정일)께서는 생애의 마지막 시기인 2011년 12월 초에도 최승희 선생이 창작한 무용의 기본 동작들을 우리 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널리 보급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0년 11월 25일 새로 개건된 평양무용대학을 찾아 "최승희 선생은 우리나라 민족무용발전에 공로가 있는 선생"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11년 11월 최승희 탄생 100돌 기념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으며, 북한은 최승희를 두고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라고 지칭한다.
▲ 2010년 11월 새로 개건된 '평양무용대학'.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곳을 찾아 최승희를 "민족무용발전에 공로가 있는 선생"이라고 말했으며, 사망 전인 2011년 12월 최승희 무용 보급을 유훈으로 남겼다. [자료사진-통일뉴스] |
신문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은 최승희가 1970년 3월과 7월에 창작한 '부채춤'을 예술영화 '세상에 부럼없어라'에 넣도록 지시했으며, 무용 '환희'를 3.8 세계여성의 날 60돌 기념공연 무대에 올리도록 했다.
또한, 딸 안성희와 함께 창작한 '농악무', '목동과 처녀', '쟁강춤', '조개캐는 처녀' 등이 무대에 올리도록 했으며, 최승희가 쓴 '조선민족무용기본(1,2)'를 학교에 보급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최승희의 춤을 '최승희춤체'라고 명명했다.
이에 앞서 김일성 주석은 최승희가 월북한 뒤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을 도왔으며, 1947년 제1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첫 공연을 열도록 했다.
이를 토대로 최승희는 '해방의 노래', '농악무', '봄노래', '양산도', '노들강변', '봉산탈춤' 등을 창작,발굴했으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축하무대에서도 춤을 선보였다.
그리고 '행복한 젊은이들', '샘물터에서', '칼춤' 등 창작했고, 10여 편의 장막무용극을 포함해 3백여 편의 무용작품창작과 '조선민족무용기본', '조선아동무용기본' 등을 저술했다.
특히, 1957년에 출판된 '조선민족무용기본'을 두고 신보는 "온 민족의 자랑이고 국보이며 그가 우리 무용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는 최승희의 묘. [캡쳐사진-통일신보] |
최승희는 생전에 "사탕물은 세 번만 마시면 싫증난다. 사탕물이 아니라 일생 먹어도 싫지않는 구수한 숭늉과 같아야 한다", "발레를 해도 조선의 넋을 가지고 해야한다"는 등의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최승희는 1911년 11월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26년부터 일본 '이시히바쿠무용단'에서 무용을 배웠다. 해방 후 1946년 월북한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 초대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지냈으며, 1969년 8월 사망했다. 현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신보는 "최승희 선생의 인생행로는 절세위인을 모시어 개인의 운명도 재능도 빛나고 행복도 있다는 생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다시금 깊이 새겨주고 있다"고 전했다.
조정훈 기자 승인 2015.09.07 15:16:44
원문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