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8066459&cloc=olink|article|default
동훈 당시 통일원 차관, 초안 첫 공개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 어언 36년 … 분단민족으로 겪어온 비운 끝맺고 1980년대 위대한 시대 함께 열어야”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
중앙일보가 박 전 대통령의 ‘통일 책사’였던 동 전 차관을 통해 단독으로 입수한 통일 선언문의 초안에는 ▶무력행사나 폭력적 방식에 의한 통일 기도는 영구히 피해야 한다 ▶반목과 대결이 아닌 평화통일을 이뤄야 한다 ▶한반도 통일을 위한 동북아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남북 모두 진정한 대화의 장으로 나오는 것이 통일을 위한 유일한 길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박 전 대통령은 선언문 요지를 ‘통일 요강’으로 정리해 발표할 계획이었다고 동 전 차관은 밝혔다. 하지만 79년 10·26 사태가 터지면서 박 전 대통령의 통일 선언문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극비리에 준비했던 통일 선언문의 존재를 아는 이는 당시 청와대에서도 극소수였다고 동 전 차관은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유혁인 당시 정무수석과 동 전 차관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79년은 박 전 대통령이 통일을 위한 노력을 적극 모색하던 때였다. 박 전 대통령은 그해 1월 1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시기·장소 등 조건 없는 남북 당국자회담을 제안한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동 전 차관을 판문점 회담본부에 내보내기도 했다. 동 전 차관은 “70년대 경제성장의 초석을 다진 후 북한 체제와 경쟁할 만하다는 자신감이 붙은 박 전 대통령의 다음 목표는 통일의 초석을 놓는 것이었다”며 “대화를 통한 평화통일이 그분의 목표였다는 사실이 10·26 사태로 역사에 묻혀 버려 안타깝다”고 말했다.
당시 준비된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진 지 어언 36년에 이르렀다. 근세 100년 비운의 시대를 닫지 못한 채 이 세기 초에 비롯된 일제 식민지 치하 36년과 맞먹는 분단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침략전쟁에 가담한 적도 없고, 또 패전국도 아닌 우리가 이토록 긴 세월을 분단 상황대로 있는 것을 체념하며 숙명으로 여기고 여건의 변화를 바라고만 있을 수 없다. 격변이 예상되는 80년대의 관문을 넘어서며 우리는 민족의 현재와 장래 문제를 매우 심각히 고려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결의를 굳게 한다.”
선언문에는 네 가지 원칙을 제시한 뒤 그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첫째 원칙인 ‘평화통일’ 부분은 이렇다.
“통일국가에 이르는 과정도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나가야 한다. 만약 남북 간에 민족상잔의 전쟁이 다시 올 경우 적어도 100년쯤은 처참하게 퇴락하게 될 것이므로 민족적 파멸을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중략) 통일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자멸에 이르게 될 비평화적인 무력행사나 폭력혁명 방식에 의한 통일 기도는 (중략) 결연코 민족의 이름으로 용납될 수 없다.(중략) 정복 개념에 따라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둘째 원칙은 ‘자주통일’이다. 강대국이 아니라 남북이 주도하는 통일을 선언문은 수 차례 강조한다.
“믿기 어려운 나라들과 그리고 불투명한 정략을 뒤에 숨긴 세력들 사이의 타산 앞에 우리의 장래 운명을 내맡길 수 없다. 남북 적십자회담의 참뜻과 7·4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화해와 대단결부터 모색해야 할 것이다. 민족자결의 원칙 밑에 이룩되어야 한다.(중략) 동북아 국제관계의 엄중한 현실인식에서 안으로부터의 주체적 노력과 병행하여 관계국 사이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외적 조건 환경의 연결 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동 전 차관은 “당시 (주한미군 철수 등 박 전 대통령과 엇박자를 냈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나 중국·러시아·일본 측에도 ‘남북통일은 해롭지 않다’는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해 일부러 강조했던 부분”이라고 말했다.
셋째 원칙은 ‘민주통일’이다. “어느 일방의 편견이나 강단을 무조건 실현하려 들 것이 아니라 모든 사업은 민족 이익이라는 기준에 충실하도록 추진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통일은 민족 성원 전체가 각기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지어져야 한다.”
넷째 원칙은 ‘남북대화’다. “남과 북 그 어느 쪽도 진실로 통일을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대화의 마당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화만이 평화적 통일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중략) 대화의 진행을 어떤 불순한 전략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중략) 불충직(不忠直)한 통일대화는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선언문은 민족이 계급이나 사상에 우선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남과 북의 지도층이 무슨 사상이니 어떤 주의 같은 것을 내세우기보다 민족적 이념으로 돌아와 민족사에 일대 전기를 실현시킬 지상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때이다”는 부분이 표적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하중 전 주중대사가 저서 『증언』에서 밝힌 김 전 대통령의 ‘통일 3원칙’(무력사용 불용, 흡수통일 불원, 교류협력을 통한 남북관계 발전)과 일맥상통한다.
동 전 차관이 공개한 선언문에 대해 서강대 김영수(정치외교학) 교수는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7·4 공동선언 이후 박 전 대통령도 내적 여론과 외적 환경을 고려해 김일성 주석과 유사한 맥락에서 ‘민족적 지도자’ 역할을 자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동국대 김용현(북한학) 교수도 “시공간을 뛰어넘어 현재에도 울림이 있다”며 “당시 북한은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김일성 주석이 정치적 목적으로라도 이 선언에 화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남북관계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언문은 이렇게 끝맺는다. “지난날 외세 침략의 장으로서, 그리고 분단 민족으로서 겪어온 비운의 시대를 끝맺고 훗날 역사에 1980년대를 산 세대가 가장 어리석은 세대로 되지 말도록 하며 새 민족사를 창조해 나갈 위대한 시대의 막을 함께 열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족사적 요청과 온 겨레의 통일에의 의지에 입각하고 80년대를 가늠하는 현실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 조국통일 과업에 일대 진전을 이루고자 여기에 ‘조국통일요강’을 정중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서거로 통일 요강은 제시되지 못했다. 동 전 차관은 “이 선언문을 준비한 지 40년이 지났지만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며 “(박 전 대통령의) 따님인 박근혜 대통령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통일 4대 요강’을 완성해 남북 평화통일의 물꼬를 터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S BOX] 1979년 초 남북 대화 제의 … 북한이 응하지 않자 ‘통일 요강’ 마련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9년 3·1절 국토통일원을 개원했다. 지금의 남산 기슭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다. 박 전 대통령의 휘호인 ‘국토통일(國土統一)’ 제막식을 시작으로 통일원에서 통일부로 이어지는 역사가 시작됐다.
통일원 개원 후 6년째인 75년 12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청와대 동훈 사정비서관을 불렀다. 그러곤 통일원 차관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통일이 쉬이 안 되니 임자가 맡으라”는 지시와 함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내용의 자필 메모를 건넸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누이동생 등 가족을 고향에 둔 동 전 차관은 이때부터 80년 1월까지 4년 넘게 차관을 지냈다.
박 전 대통령은 79년 1월 19일 “국장급회담에서 정상회담까지 다 열 수 있다”며 남북 간 대화를 제의했다. 당시 남측 실무협의 대표가 동 전 차관이다. 그러나 판문점 협상 테이블에 앉은 동 전 차관의 맞은편 좌석은 빈 채로 남았다. 북측이 대화에 응하지 않아서였다. 이후 북측을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마련했던 것이 ‘통일 선언문’과 ‘통일 요강’이라고 동 전 차관은 전했다. 그는 “정확한 역사를 위해 기록을 공개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며 “박 전 대통령이 경제뿐 아니라 남북관계 발전에도 큰 관심이 있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동 전 차관 자택에는 박 전 대통령이 쓴 ‘국토통일’이란 네 글자가 액자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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