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교도통신사 http://www.47news.jp/korean/korean_peninsula/2015/07/119663.html
징용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우판근 씨 【교도통신】2015/07/27 |
▽결의
근대 제철의 시작을 알린 관영 야하타(八幡)제철소(기타큐슈시=北九州市). 경기도 성남시의 주석봉 씨(91)는 1943년, 후신인 일본제철(日本製鉄) 야하타제철소로 동원됐다. 지역 행정사무소의 지시를 받았지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이 괴로워 거절하고 싶었다. “쌀 배급이 중단되면 가족이 굶게 될지 모른다”고 도항을 결의했다.
용광로 작업에 종사했다. “일본인은 성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식사도 임금도 부족했다고 증언한다. 세계유산 등재는 이해한다는 주 씨. “과거의 역사를 지우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도주
경기도 안성시의 윤한수 씨(91)는 1943년, 일본에서 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른 채 배와 철도를 갈아탄 뒤 도착한 곳은 미이케(三池)탄광이었다.
후쿠오카(福岡), 구마모토(熊本) 두 현에 걸쳐 있으며 국내 굴지의 채탄량을 자랑했던 미이케탄광은 미야하라(宮原)갱, 만다(万田)갱, 전용철도 유적 등 3곳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윤 씨가 일하던 곳은 인근의 미카와(三川)갱이다. 땅 속 깊이 있으며 내부는 고온 다습했다. 조금만 작업해도 땀이 쏟아지고 온 몸이 숯으로 검게 변했다. 낙반, 가스사고는 다반사였다. “매일처럼 동료가 죽었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조선인들만 거주한 사택에서는 일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공포심 때문인지 몸 상태가 안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상사는 폭력을 사용해 일하러 보냈다. “그 상황에서 저항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한번은 오사카(大阪)의 동료를 의지삼아 4명이 함께 도망쳤다. 거리는 공습으로 불 탄 상태였다. “일자리는 없고 한 사람 분의 배급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해 바로 탄광으로 돌아왔다.
▽대치
스무살 때 미이케탄광으로 온 서울시의 손충구 씨(92)는 “언제 해방될 지 몰라 절벽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식사는 거의 딱딱한 콩찌꺼기 뿐이었다. 밥공기에 넣고 쌀처럼 불려서 먹었다.
대부분의 탄광이 있었던 후쿠오카현 오무타시(福岡県大牟田市)에는 징용됐다가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비가 있다.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오무타 지부가 중심이 돼 1995년에 건립됐다. 탄광을 경영하던 미쓰이(三井)계열 기업도 자금을 냈다. 우판근 지단장(77)은 “기업이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마음을 표시해줬다”고 평가한다.
일본 정부는 징용의 역사를 전하는 시설 등을 검토하고 있으며 구체화는 지금부터다. 우 지단장은 “역사와 대치해 징용이라는 어두은 측면을 은폐하지 않는다면 더욱 훌륭한 세계유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교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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