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통일뉴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735
500년 고려왕조를 뒤엎고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일파를 반대해 72명의 고려 충신들이 세상을 등지고 들어간 곳이 ‘두문동’ 이들은 ‘요사스러운 것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것을 맞이한다’는 뜻이 담긴 ‘탈’을 만들어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귀신몰이’라는 행사를 했다. 이들 중 한명이 당시 봉산군수로 있던 ‘이유록’에게 그 내막을 말하자 이유록은 그에게 “지금 나라의 정세가 복잡한데 그런 일을 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우니 탈을 자기에게 맡겨두고 빨리 돌아가라”고 권고했다. 이유록은 이후 나라의 정세가 점차 안정되자 봉산의 아전들에게 그 탈을 가지고 탈놀이를 벌이게 했고 이것이 ‘봉산탈춤’의 유래가 되었다.(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소 리영호 실장)
<노동신문>은 10일 민족문화유산인 ‘봉산탈춤’의 역사적 유래와 특징,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소멸될 위기에 있던 봉산탈춤을 복원·전승한 해방 후 역사에 대해 자세히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황해북도 봉산군 일대에서 수백 년간 전승되어 온 ‘봉산탈춤’은 일제 강점기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더욱 높은 수준에서 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이다. 신문에 따르면, 봉산탈춤은 지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세련된 예술적 형상으로 인해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으며 일제 식민지통치 시기에도 고유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널리 공연됐다. 그러나 봉산탈춤 공연장에서 여러 가지 반일행사가 벌어지는 것을 빌미로 일제가 내린 ‘봉산탈춤 상연금지령’으로 인해 주역인 탈꾼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봉산탈춤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김일성 주석이 봉산탈춤 재연을 과업으로 제시하면서 수십 명의 봉산탈꾼들이 공연준비를 거쳐 그해 6월 2시간여에 걸친 공연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이후 김 주석은 ‘봉산탈춤보존회’를 결성하도록 하고 보존회사업비와 특별상금을 수여하는 등 관심을 기울여 한국전쟁 시기에도 공연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또 전후 경황없던 시절에 봉산탈춤을 다큐멘터리(기록영화)로 만들었으며, 이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훗날 재촬영해 완성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3년 6월에는 봉산군 은정리를 찾아 봉산탈춤 공연을 직접 관람하기도 했으며, 그해 황해북도 봉산군 정방리 당위원회는 봉산탈춤을 새롭게 창작해 보급한 바 있다. 한편, 봉산탈춤 외에도 황해도 지방의 탈춤들은 모두 양반과 중들의 방탕한 생활과 부패 무능을 풍자하는 내용이 깔려있는데, 특히 해주탈춤은 양반들에 대한 풍자가 더욱 강하다고 신문은 설명했다. 해주탈춤은 춤 구성이 비교적 간단하며, 동작들은 생활적이면서도 긴 한삼을 착용한 팔을 머리위로 높이 올려 폭넓게 휘돌리면서 위풍있고 시원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특징. 많은 인원이 등장해 활달한 춤동작을 펼치는 봉산탈춤과 달리 강령탈춤은 대부분 두 명의 탈꾼이 등장해 마주서서 동작을 수행하는데 탈꾼들의 예술적 기량이 높고 춤의 형상이 특색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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