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교도통신사 http://www.47news.jp/korean/korean_peninsula/2015/07/118271.html
재일코리안인 김시종 시인은 일본 식민지 통치하(일제강점)의 조선(한)반도에 태어나, 해방 후 지금의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 봉기에 관여해 부모와 고향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와야 했다. 회상기 ‘조선과 일본에서 살다(朝鮮と日本に生きる)’(이와나미=岩波 신서)에서 밝힌 것은, “조국으로 송환돼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 등을 우려해 이야기하는 것을 피해 온 기억이다.
▽학살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났다. “남측 만의 단독선거는 조선반도 분단을 고정화시킨다”며 도민이 무장 봉기했고 군과 경찰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1954년까지 3만 명을 넘는 도민이 살해됐다. “학살된 시신만큼 지저분한 것은 없었다”. 방치된 시신에서는 강렬한 냄새가 풍겼으며 구더기가 모여들었다. 그래도 “혈육인 부모들은 시신에 매달렸다”.
“죽음을 강요당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참극을 잊지 않기 위해, 전쟁과 동란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아름답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전쟁 포기를 노래한 일본국 헌법을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주옥의 보배. 인류를 위해 보전해주기 바란다”고 말한다.
▽이별
도민 봉기에 관여한 남조선 노동당 연락원이었기 때문에 쫓기는 몸이 됐고 1949년 아버지가 준비한 어선으로 탈출했다. 무인도에서 배를 내려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밀물과 썰물 소리를 세면서 4일간을 지냈다. 머지않아 6월을 맞이하는 시기였지만, 바람은 찼고 캄캄한 밤의 공포가 몸에 스며들었다고 한다.
제주도를 떠날 때 어머니는 설탕을 입힌 콩을 싸줬다. 입에 넣고 부풀기를 기다렸지만, 많은생각들이 떠올라 충분히 씹지 못하고 삼켰다.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되는가.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것이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이 됐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40년 가까이 지난 1998년, 제주도의 산소에 성묘를 갔다. 그때부터 방문할 때마다 땅에 손을 대고 잠시 동안 가만히 있는다. 되뇌이는 것은 언제나 사죄의 말들이다.
“어머니에 차 한 잔도 드린 적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술을 좋아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 좋은 술도 마실 수 없다. “마음에 걸려서. 항상 싼 술을 사서 마시지”.
▽이단
시인의 조건으로 “아부하지 않는다, 복종하지 않는다, 체제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닳고 닳은 개념이나 정의에 불신감을 표명하고 세상의 상식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시대의 이단자를 ‘시인’이라 부른다.
일본의 근대 서정시에 푹 빠져 있던 어린시절, “식민지 지배의 뻔뻔스러움, 무자비함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오보로즈키요(朧月夜)’ 같은 부드러운 노래를 배웠다”.
하지만 일본으로 건너온 후 시인 오노 도자부로(小野十三郎)의 감정적인 언어를 철저히 배제한 작품과 만나면서 일본어의 다른 면을 발견했다. 그러한 체험을 “시란 이런 것(생략)이라는 내 생각은 근본부터 뒤집혔다”고 쓰고 있다. “나의 언어는 매우 완고하다. 지금도 좀 긴장을 풀면 나를 뒤틀리게 키운 (감정적인) 일본어로 돌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시대의 이단자’는 일본 사회의 자세에 경종을 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가만히 있으면 보장되지 않는다”. 안보법제 논의는 추진되고 있으며 전후 70년의 발자취는 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조용하다. 매우 온화하다. 무서운 일인데도 말이지”.【교도통신】
【약력】김 시종 : 1929년 부산 출생, 제주도에서 자람. 시집 ‘잃어버린 계절(失くした季節)’로 2011년에 다카미준상(高見順賞) 수상. 시집에 ‘이카이노시집(猪飼野詩集)’ ‘광주시편(光州市片)’ 등. 저서에 ‘ ‘재일’의 틈새에서(『在日』のはざまで)‘’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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