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FP 2015/ Jung Yeon-Je |
미국이 소련에 일본과의 전투를 청탁한 이후, 소련 붉은군대가 한반도에서 일본 관동군을 몰아내며 한반도는 마침내 식민지 통치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차후 소련과 미국이 지지한 세력의 불화로 남과 북으로 분리된 시스템에 놓이게 되며 결국 전쟁을 통해 한때 단일민족을 이루던 나라는 두동강났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며 최근 한국 언론에서는 해방과 민족 분단 사건을 엮으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제빈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문제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역사적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빈 소장은 '한반도 해방과 분단 날짜를 한날로 엮으려는 한국 언론 보도는 '부당하다''며 조국 분단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세력의 시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이와 관련한 유사 성명이 남북 양측 모두로부터 울려퍼졌다. 올해 6월 학봉현 주영 북한 대사가 지구촌전략포럼으로 꽤 영향력있는 'Global strategy forum'에 참석해 '북한은 올해 외부 세력에 의해 갈라진 남북 분단 70주년을 맞이한다'고 밝혔다. 이 성명 내용에 대해 제빈 소장은 큰 반발감을 드러냈다:
"해방 후 3년 지나 1948년만 하더라도 김일성 북한 주석이 한국과의 평화적 통일에 관심이 있었다. 그해 4월과 6월 김구, 김규식 등 당시 영향력있는 한국 정치인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4월 회담에서는 통일 조국 설립의 기초를 마련하는 문서가 채택됐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통일의 길은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1945년 해방되자마자 민족이 분단되었다는 주장은 그 어떤 근거도 갖지 못한다."
1945년 해방되던 당시만해도 남과 북은 서로 왕래가 가능했으며 확실한 경계선 또한 부재했다. 양측간에 경제적 거래도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48년 8월 15일 한국이 공식적으로 합법적 국가를 선포했고 그후 3주 지난 1948년 9월 9일 북한 역시 한반도 2번째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이러한 상황은 반목 이념을 고취시키며 결국에는 전쟁으로 치닫게 했다. 그러나 한국전을 외부 세력에 의한 전쟁뿐으로 보는 해석 또한 역사 왜곡이라고 알렉산드르 제빈 전문가는 계속해서 관련 견해를 피력했다:
"소련 고문서에 따르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군지 명확히 밝혀져 있다.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김일성 주석에 관한 얘기다. 당시 소련을 통치하던 스탈린이 이에 오랫동안 반대했다고 고문서에 기록돼 있다 — Sputnik)
서방 역사학자들은 양측 모두 전쟁을 준비했다며 사실상 전쟁은 1950년이 아니라, 1949년에 이미 미국과 소련 점령지역 경계선을 따라 포병 전투가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한편, 당시 한국 정부를 통치하던 이승만 또한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고수하며 휴전협정 서명을 거절했다. 그 결과 휴전협정에 유엔 사령부 미국 장군이 직접 서명하게 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토대로 남북 분단 현실을 소련, 미국 외세 탓만으로 돌리려는 시도는 한국, 북한 정치인들의 책임 회피 맥락으로 해석된다."
원문기사 보기: http://kr.sputniknews.com/opinion/20150817/519437.html#ixzz3j9h4eUFs
댓글 없음:
댓글 쓰기